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토 협정 (문단 편집) == 배경 == 1931년 [[만주사변]], 1933년 [[열하사변]]을 통해 동북삼성과 열하성을 병탄한 [[일본 제국]]은 이번에는 화북 5성의 괴뢰화를 노리며 화북 분리공작을 취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 기자 2명이 암살당한 하북 사건과 손영근의 동북의용군이 난주에 주둔한 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은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 위원장 [[허잉친]]을 위협해 6월 10일 하북성의 [[중국 국민당]] 당부와 중국군을 퇴거시키는 [[하매 협정]]을 체결했다. 이 하매 협정의 체결은 화북주둔군의 주도였는데 한편 관동군은 차하얼 성에서 비슷한 공작을 취하고 있었다. 1935년 6월 5일, 장북에 잠입한 일본군 특무기관원 4명이 장자커우 지역의 불법 측량을 하던 중 차하얼 성 주석 [[쑹저위안]]의 제29군 병사들과 조우했다. 29군 병사들이 통행증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제시하지 못해 중국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를 [[장북 사건]]이라고 하는데 일본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쑹저위안의 지시로 29군은 이들을 8시간 만에 석방했지만 관동군의 도이하라 겐지는 이를 일본군인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하면서 확대를 꾀했다. 6월 10일, 도이하라는 중국 측이 이유 없이 일본인들을 구타하고 모욕했다고 주장하며 장가구의 특무기관장 마쓰이 중좌에게 지시하여 사건의 직접 책임자를 처벌하고 쑹저위안의 사죄를 5일 안에 받아낼 것을 중국 측에 요구했다. 국민정부는 [[하매 협정]]의 전례를 볼 때, 일본군이 다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것이라 여겨 선수를 치기 위해 일본 측에서 쑹저위안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노려 6월 18일 쑹저위안을 차하얼 주석에서 해임하고 민정청장 친더춘을 차하얼 주석으로 임명하고 일본 측과 협상하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